아르메니아 학살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만 제국에서 자행된 인류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참혹한 대량 학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15년부터 1917년 사이에 약 150만 명에 달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 정부의 체계적인 정책에 따라 목숨을 잃었다. 이는 단순한 전쟁 피해나 민족적 충돌로 치부할 수 없는, 명백한 인종 청소이자 국제사회가 "집단학살(Genocide)"로 정의한 사건이다.
기원과 배경
19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병자로 불릴 정도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발칸 지역에서의 민족 독립운동과 유럽 열강의 간섭은 제국의 정치적 위기를 심화시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민족, 다종교 사회를 유지해 온 오스만 체제는 불안정해졌고, 중앙 정부는 점차 이슬람교 중심의 통합 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인은 제국 동부와 코카서스 지역에 거주하며 주로 농업, 상업, 학문에 종사하던 소수 민족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독교를 신앙으로 하여 다수의 무슬림 인구와 종교적 차이를 가졌으며, 경제적 성공으로 인해 종종 질시와 적대감의 대상이 되었다. 19세기말, 아르메니아인은 오스만 정부에 대한 개혁 요구를 제기했다.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동등한 시민권과 세금 개혁을 포함한 정치적 요구를 했으나, 이는 오스만 당국에게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1894년부터 1896년 사이, 압둘하미드 2세 통치하에서 약 2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함디에 학살로 불리는 대규모 탄압의 희생양이 되었다. 당시 유럽 열강은 이를 강하게 비난했으나, 오스만 제국의 내부 문제로 간주하며 실질적 개입을 꺼렸다. 이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국제 사회로부터 방치된다는 인식을 강화했고, 이후 대규모 학살로 이어지는 길을 닦았다. 1908년 청년 튀르크당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은 후, 오스만 제국은 표면적으로 개혁과 민주화를 추진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청년 튀르크당의 이념은 곧 튀르크 민족 중심주의로 변질되었고, 이는 제국 내 소수 민족에 대한 차별과 배제 정책으로 나타났다. 특히 1913년 발칸 전쟁에서 패배한 후,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소수 민족은 오스만 제국의 쇠락을 초래한 "내부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학살의 전개
1915년 4월 24일, 오스만 정부는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서 아르메니아인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 약 250명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이는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중심을 제거하고 저항 가능성을 무력화하기 위한 계획적인 조치였다. 이 사건은 이후 대규모 학살의 첫 신호탄으로 작용했다. 학살은 곧 아르메니아인의 대규모 강제 추방으로 이어졌다. 오스만 당국은 수십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을 고향에서 내쫓아 시리아 사막으로 이송했다. 이 과정에서 식량과 물은 거의 제공되지 않았으며, 수송대는 군사와 민간 준군사조직의 공격을 받았다. 사막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 탈진, 질병, 그리고 조직적인 살해로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주지에서 더 열악한 환경에 직면해야 했다. 당시 이 장면을 목격한 외국 외교관과 선교사들은 시체의 산과 같은 끔찍한 광경을 기록으로 남겼다. 여성과 어린이는 특히 학살의 잔혹한 대상이 되었다. 여성들은 납치, 강간, 성적 학대의 피해자가 되었으며, 일부는 강제로 개종해 오스만 가정으로 흡수되었다. 아이들 역시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많은 경우 가족을 잃고 노예로 전락하거나 강제 노동에 투입되었다.
결과와 논쟁
학살의 결과, 아르메니아인은 고향을 잃고 전 세계로 흩어졌다. 이들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지로 이주하여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집단적 기억과 정체성을 유지했다. 아르메니아 학살은 후손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으며, 오늘날까지도 이들의 역사적 정체성과 정치적 요구의 핵심 요소로 남아 있다. 아르메니아 학살은 현재까지도 국제 사회에서 뜨거운 논쟁거리다. 30개 이상의 국가와 유엔은 이를 집단학살로 공식 인정했으나, 터키는 이를 강하게 부인하며 내전 중 발생한 비극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부인은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로 비판받으며,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외교 관계를 악화시키는 주요 요인이다. 아르메니아 학살은 국제법에서 집단학살 개념의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특히, 법학자 라파엘 렘킨은 이 사건을 연구하며 Genocide라는 용어를 정의했고, 이는 1948년 유엔 집단학살 방지 협약으로 이어졌다. 이 협약은 아르메니아 학살의 교훈을 반영해 대량 학살을 예방하고 처벌하는 국제적 기틀을 마련했다.
결론
아르메니아 학살은 단지 과거의 잔혹한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국제사회가 인종적, 종교적 갈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학살의 진실을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피해자와 생존자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집단적 증오와 차별이 가져오는 파괴적 결과를 명확히 배워야 한다. 역사적 진실을 인정하고 화해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와 정의를 위한 첫걸음이다. 아르메니아 학살은 인류애와 연대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며, 다시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일깨우는 영원한 경고로 남아 있다.